Giman Lee's profile

Pretty is not Beautuful

Pretty is not Beautiful 

A Language of beauty is created by nature, and a language of pretty is created by human.

The criterion for a good designer's judgment is whether it has gone to the realm of aesthetics or not.

The criterion for a good designer's judgment is whether it has gone to the realm of aesthetics or not.

Only time makes beauty.

Straight lines become curved lines. There is no straight line in nature. Only humans create shapes that are not natural. Without a deep understanding of design, machines and tools gradually progress, while the human environment gradually becomes bad.

유행에 현혹되지 않고, 능률만을 목적으로 한 노력은 가장 세련된 단순한 형태를 낳는다.

광고나 여론이나 일상생활의 타성으로 심리적인 영향을 받아 자기의 옳은 판단력을 믿지 못하고 물심양면에 걸쳐 그릇된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또 인생의 중대문제에 대해서 자유의지라는 신성한 자연의 선물을 포기한다.

디지털 사회라 열광을 하며 기술 혁신에 찬양을 하지만 이것은 아름다운 꽃을 보고 조화같다고 하고 멋있는 경치를 보고 그림과 같다고 칭찬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파괴에 의해 만들어 내는 무늬는
재료의 최약점의 연속을 나타내는 무늬이다.

파괴에 의해 만들어지는 부분 이외의 부분은 반대로 가장 강한 부분을 의미한다. 만일 도자기의 균열이 나타나지 않는 부분을 따라 철사로 그 뼈대를 만든다면 가장 강한 골조를 만드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균열이 나타나는 패턴은 비록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중국의 한자와 이집트의 상형문자로부터 Stained Glass와 회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다.

Stained Glass의 그림도 납이 유리에 밀착되도록 망 모양의 디자인이다. 또 상형문자나 한자도 단어의 의미가 동결된 상태인 구열형태로 되어있다. 구성의 개념을 정의하기 힘든 회화에 있어서도 그 작품 전체에 구열패턴을 사용했고 Klee나, Brague는 추상적인 구열 패턴에 열광했던 화가였다. 에나멜의 구열모양을 의식적으로 도자기나 도기조각에 표현하려는 것은 자연적이고 고유한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디자인에 있어서 2점간의 최단거리는 직선이 아니라 SLALOM 곡선이다.

Slalom이란 인간에 의하여 가속과 감도에 따라 자연적으로 규제되는 궤도곡선이다. 초속도와 중력의 영향만을 받은유도탄은 과학적으로 완전한 원주곡선군의 궤도를 그린다. 그러나 인간이 조종을 하게되면 인간의 궤도인 Slalom을 이루게 된다.

디자이너가 Slalom 곡선에 대해 관심을 갖게되는 이유는 그것이 최소의 노력으로 생긴 곡선으로 어떤 운동에 대한 가장 경제적인 패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느날 지각하게 된 학생이 직각으로 꺽어진 길의 지름길로 갈 것을 생각했다면 그는 Slalom을 그리여 걷게 될 것이다. 더 급한 학생이 뒤를 따라 걸었을 때 그의 Slalom은 더욱 짧고, 큰 커브를 그렸다. 길에 눈이 쌓여 길이 안보이면 직각인 길은 Skier가 기문을 통가할 때 생기는 자연적인 Slalom 곡선과 같이 우아하고 부드러운 곡선으로 변한다.
지적 우아함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적 우아함을 외형적인 우아함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지적 우아함이란 인류 역사를 통해 모든 명작을 만들어 낸 숭고한 지성이다. 지적 우아함은 그리스 조각, 르네상스 회화, 괴테의 숭고함 글 그리고 많은 위대한 창조정신에서 볼 수 있다.  특정 시대의 건축과 모든 시대의 음악 그리고 오랜 시대를 통해 밝혀진 과학의 명확성 등이 지적 우아함이다. 지적 우아함은 어떤 디자인을 하든 우리를 가장 좋은 해결 방법으로 인도하는 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정신이 분명하게 추구하는 목표이고, 여기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이것에는 소박한 작품을 위대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힘이 있다. 지적 우아함은 시민의식, 사회적 책임, 품위, 기획 방법, 도덕적 책무이며, 단순한 디자인 스타일이 아니라 심오한 의미이며 디자인의 본질이다.
최소동작의 원리에는 인간의 운동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

디자인에서는 기하학적인 물체를 순수하게 추상적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결합하여, 인간의 행동과 관계된 형태를 취급하는 것이다. 디자인에 있어서 최소거리의 개념은 순수기하학적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디자인에서 최소거리는 최소의 노력을 요하는 거리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최소의 에너지와 열량을 요하는 가장 효율적이고도 경제적인 거리인 것이다.

만일 15미터 폭의 통로를 백여명이 지나가게 되면 서로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자유로이 걷게된다. 그러나 폭을 1.5미터로 줄이게 되면 사람들의 걸음속도는 급격히 줄어들어 "줄을 서서 기다리는 형태"와 같이 거의 정지상태로 될 것이다.
​​​​​​​기능적 차이가 디자인의 미묘한 차이를 결정한다

오히려 실제에 있어서, 문명의 실질적 진보에 반비례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것은 일상생활의 가장 단순한 필수품에 있어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디자인은 모든 사람에게 관계가 있다. 생활도, 식사도, 바램도, 놀이도 그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도 디자인은 한정된 일부의 사람들이 감상하는 특권이라 생각되어지고 있다. 주택, 사무소, 교회 등의 건물에서부터 큰 것으로는 자동차, 냉장고 스토브, 작은 것으로 식기, 램프, 쇠망치 등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설계한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나쁜 디자인에 좌우되지 않는 것 뿐만 아니라 외견상의 편리함이나 과대선전에 현혹되거나 인습적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기능적이며, 건전한 단순함을 가진 좋은 디자인을 이해하는 자그만 길잡이로 되고자 이 콘텐츠를 만들었다.
석기시대의 사람들이 디자인한 도구의 손잡이는 현대 우리들이 백화점에서 사는 물건보다 더욱 그 기능을 이해하고 있다.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쓰고 있는 용기의 모양의 미묘한 찿이는 기능적인 원인이 직접적으로 스타일을 결정하는 것을 말하며 모두 그 크기에 어울리도록 손잡이가 붙어있다. 디자인이 어떤 행동의 움직임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기하의 정리와 같이 매우 필연적인 결론이다.
인간 동작의 선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디자이너는 언제나 실패를 거듭한다
디자인은 결코 한 사람의 우수한 디자이너의 창작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 사람과 인연이 적은 시대는 역사상 없었다. 디자인은 모든 사람이 관여한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작가가 디자인 하라는 듯은 아니다. 생활 속에서 언제나, 누구에게나, 통용한다는 뜻이다. 디자인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지 않으면 기계나 도구들이 차차 진보되어 나가는 반면에 인간의 환경은  점차 나쁜것이 되어간다.

많은 사람들이 심한 선전문구로 스타일 위주의 틀린 디자인을 찬양하고 있다. 디자이너가 양식을 잃어버리고, 형, 선 등을 구실로 삼아 겉으로 패션 디자이너와 같은 말을 한다. 우리들은 매일 되풀이되고 있는 졸렬한 디자인에 굴복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혈통서가 붙은 개마저도 같이 취급하고 싶지는 않다.​​​​​​​
불안감이 디자이너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PC나 스마트폰을 이용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디지털사회에서 이처럼 길게 비유하면서 설명하는 것이 그냥저냥 그럴듯하게 포장하는데 익숙한 디자인을 해온 디자이너들에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디자인은 단지 겉으로 들어나는 모양이나 스타일에 국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예쁜 것과 아름다운 것과의 차이라든가 잘생긴 것과 멋진 것과의 객관적인 구분을 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영역은 눈을 사로잡는 형태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빨려들어가게 만드는 매력은 아름다움의 차원에서 이야기 되어야만 이해될 수 있다.

UX디자인이나 그리드 시스템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디지털이라는 것이 인간들을 얼마나 불안한 존재로 만들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한국의 도자기나 한국의 절을 보면 산과 나무, 흙과 풀등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디자인을 들어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더러운것을 경멸하는 태도는 올바른 디자인에 대한 접근법이 아니다. 더러운것은 예쁘다의 반대적인 개념은 될 수 있겠지만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아니기 떄문이다. 자연의 관점에서 더럽다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떄문에 시스템이나 그리드에 의지한 디자인에서 인간미가 느껴지 않고 획일화된 디자인이 지배하게 된 이유다.

비 한방울이라도 맞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조그만 우산 속에서 벗어나기를 두려워 하는 디지털사회의  불안한 심리가 담겨있다. 만남을 통한 판단이나 직관을 믿지 못하고 여러가지 온라인 정보에 의지하며 조사자 자신은 또한 딴 사람에게 조사되어지는 디지털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올바른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까 기업의 가치를 담아내야하는 디자이너로서 고민해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획일화된 시스템 디자인이라는 우산안에 머물며 잉여 디자이너들 중 한명으로 존재하게 된다. 

작은 기업이든 큰 기업이든 그동안 이룩해왔던 그들 나름의 치열했고 고유했던 업적과 미래 비전과 목표라는 기업의 가치는 획일적인 시스템으로 표현되어질 수 없다. 기업 고유의 가치는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맥락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맥락을 담아 낼 수 있는 디자인을 해야 디지털 사회에서 AI에 이끌려가는 잉여 디자이너가 되지 않는다. 유행에 흔들리지 않는 일상생활을 지배하게 되는 디자인에 대해 고민해봐야한다.
Pretty is not Beautu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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